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번의 난 (문단 편집) === 남명과 번국 === 기본적으로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장강 이남의 [[중국 대륙]]의 지리에 익숙치 않았는데 이들이 중원을 지배한 것은 약 600년 전 [[금나라]]시절 화북 지역에 한해서였으며, [[장강]] 이남으로는 내려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강 이남은 화북 지역과 달리 강과 산악 지형이 많아서 청군의 최대 전력인 기마병을 활용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누르하치, 홍타이지와 같은 청나라 지도층도 화북을 지배했던 [[금나라]] 재건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중국 전체를 제패하는 것까지는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고, 순식간에 장강 이북을 차지했음에도 명의 잔존 세력을 추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당시 청나라의 실세인 도르곤 역시 이러한 이유들로 남진을 주저했다. 한편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나라가 망했지만 남은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들은 남경과 광동에서 각각 칭제한 후 명나라의 계승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본래 명나라는 남방에서 시작한 왕조이기에 [[정강의 변]]으로 급히 쫓겨온 남송보다 비교적 나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화북에만 머무른다면 다시금 [[남북조시대]] 또는 [[남송]] 시절처럼 장강을 경계로 장기간 양국이 대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명조의 신하였다가 청조에 귀순한 [[홍승주]]는 남명을 놔두면 커다란 후환이 될 것이라고 [[도르곤]]과 [[순치제]]에게 계속 상주했고, 결국 청나라는 남명을 정벌하기로 한다. 전술했듯이 청나라의 만주족과 몽골족들은 남방의 지리에 무지했기에 [[오삼계]]를 비롯한 한족 항장들과 그 휘하의 한족 병사들이 남방 정벌군을 이끌게 되었다. 청나라 측은 이들을 아예 자치권을 가진 번국의 임금인 번왕(평서왕 오삼계, 평남왕 상가희, 정남왕 경중명)으로 봉했는데 중국사에서 [[한고조]]이래 공신이라도 황족이 아닌 신하를 "왕"으로 봉한 예가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비황족인 조조가 위왕, 사마소가 진왕, 이연이 당왕에 등극한 예가 있지만, 이런 경우는 나라가 이미 찬탈 당하고 있거나 망해가고 있는 플래그다.] 그러나 청나라의 후대에 못지 않게 이들은 만주족의 중국 대륙 장악에 있어 최고의 공신들이었다. 경중명과 상가희가 청에 망명하면서 데려온 수군과 [[홍이포]] 전력 덕분에 청나라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쉽게 점령하고, 명군의 강력한 화력에 같은 화력으로 맞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며,[* 이래서인지 강희제 시기에 벌어진 [[문자의 옥]]인 '명사집략 사건'에서 명나라를 따르던 이들은 경중명과 상가희를 나라 팔아먹은 도둑놈이라 비난했다.] 심지어 오삼계는 청나라에게 천혜의 산해관 문을 열어준 그야말로 일등 공신이었다. 만주족은 지리에도 어둡고,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풍토병이 많은[* 당시만 해도 만주족이 [[천연두]]에 별로 면역이 없었는지 입관 전후 천연두 유행으로 수많은 만주족이 사망했고, '''심지어 [[순치제]]조차 천연두로 23세에 사망했다.''' 일설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인조의 항복만 받고 서둘러 물러난 이유도 본거지인 만주의 천연두 유행 때문이라고 한다.] 장강 이남을 공략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예 병력인 만주병과 몽골병이 아닌 한족 출신 번왕들과 그 휘하 세력을 활용하기로 한다. 항장 출신 번왕들은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남명을 철저히 공략했고, 이들의 손에 남명이 멸망하면서 그나마 남은 주씨 황족들과 명나라 잔당들은 모조리 소멸한다. 청나라는 해당 번왕들이 정벌한 지역들을 영지로 하사했고, 이에 [[운남성]]과 [[귀주성]]는 오삼계에게, [[광동성]]과 [[광서성]]은 상가희에게, [[복건성]]은 경중명에게 귀속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만주족은 [[이이제이]]를 역이용한 셈이었다. 이렇게 만주족은 한족 출신 항장들과 그 세력들을 이용하여 손쉽게 남명을 포함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제압했고, 차후 재발할 수 있는 한족들의 저항과 외부 세력의 침공에 대비하면서도 청나라 편에서 공을 세운 한족 인사들을 후대할 겸 그들에게 번왕의 직위를 내려 남방 지역의 군사적/행정적 업무를 담당케 했다. 그러나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만주족 중심인 청나라에게 제국 내에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강대한 한족 세력들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 예로 삼번은 청 조정의 허가 없이 임의로 자신들의 직할 병력을 증강하거나 세수 지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적극적 상행위로 부를 축적했고,[* 경정충은 복건의 소금과 생선 무역, 광산업 등으로 부를 축적했고, 오삼계는 운남과 몽골에 대한 차, 말에 대한 무역은 물론 고향인 요동 지방과 연계한 약재 작사로 엄청난 이윤을 남겼다.] 번 내부의 인사 뿐 아니라 주변에 위치한 각 성들의 인사권에도 줄곧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오삼계는 그 정도가 심했는데 운남 일대의 소수민족들을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평시에도 경정충이나 상가희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수만 명의 군대를 유지했고, 독자적인 화폐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운남과 귀주에서는 청 조정의 인사권보다 오삼계의 인사권이 중시되었다.[* 이에 병부에서는 '운남과 귀주에 결원이 발생하면 병부가 새로운 인사를 내려보내는데 오삼계가 이미 다른 인사를 임명하여 번거롭게 다시 올라오는 경우가 많으니 오삼계가 적임자를 보내달라고 할 때만 내려보내죠.'라고 상소를 올릴 지경이었다.] 여기에 남송 시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장강 이남의 경제력이 장강 이북의 그것을 능가함에 따라 삼번의 경제력도 청나라에 위협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미 삼번의 한 곳인 광동성의 [[마카오]]는 개항되어 있어서 서양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더욱이 장강 이남은 명나라 시절 농민 반란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기에 명청교체기 당시 피폐해진 화북에 비해서 경제가 훨씬 안정적이었기에 청으로서는 삼번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통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함부로 번을 폐지할 수도 없었다. 전술했듯이 해당 번왕과 그 세력들은 명청교체기에 청나라를 위해 엄청난 공을 세웠으니 명분 상 하루아침에 박대할 수 없었고, 만주족 중심의 청나라 중앙군은 장강 이남의 지리에 익숙치 않았으며, 당시 삼번의 군대는 대다수가 한족으로 소수인 만주족의 병력보다 규모가 더 컸을 뿐 아니라 남명과 소수민족들의 반란을 토벌하면서 얻은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애당초 오삼계의 직속부대는 산해관에서 청나라의 입관을 저지하던 명나라의 정예병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장강 이남은 반청감정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그나마 남방 지역의 통제력을 구축한 번을 폐지하려다가 되려 반청복명세력[* 대표적으로 대만의 [[정성공]] 세력이 있었다.]들이 겉잡을 수 없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로 청나라 조정은 남명이 완전 진압된 지 한참 지난 1664년에도 남명 토벌을 위해 설치한 삼번을 폐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